평범한 날이었다.
늦잠을 잤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호스트는 다른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일찍 집을 나섰나보다. 식탁 위에 오늘 내가 할 일을 적어두고 갔다. 새로하는 일들이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닌가보다. 대신 어렵지 않겠다. 기왕 늦잠잔거 아침 잘 챙겨먹고 한 시간 늦게 일을 시작했다. 병아리들을 위한 풀 자르는거에도 이제 요령이 생겼다. 제초카트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긴 풀은 자르기가 훨씬 쉽다. 병아리들도 이제 어느 정도 자라서 물통에 익사방지용 돌은 깔지 않아도 된다. 일이 하나 줄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잡초를 잘라낸다. 내가 한국에서는 빠릿빠릿했는데 여기와서 일하는게 왜 이렇게 느린가 생각해보니, 동영상 찍고 사진 찍는다고도 느리지만, 라디오 듣는다고 느리다. 스피커 음량이 크지 않은데 내가 빨리 움직이면 내 소리때문에 라디오 소리가 잘 안들려서 슬렁슬렁 하고 있는거다. 그래도 나에게 느리다고 뭐라 하는 사람 없는 곳이다. 아침을 늦게 먹어 1시가 되어도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냥 2시간 얼른 일하고 밥먹고 쉬어야지 생각했다. 팔레트를 해체하는 작업은 재밌다. 한국에서 못질도 제대로 안해봤는데 여기선 정말 별걸 다 해본다. 그리고 알게 된 건 적절한 도구를 찾아 사용하는 일이 참 재밌다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농사와 예술활동에 필요한 도구들이 잔뜩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은 아직 요령이 없는가, 요즘 팔이 왜 아픈가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다. 망치질하는 오른팔과, 그걸 잡고 있는 왼쪽 손목이 아프다. 손목이 충격을 다 흡수하는 것 같다. 아, 이제 한시간밖에 안남았다. 건초 덮는거 시간 꽤 걸리는데. 부지런히 한다고 했지만 역시 시간 내에 다 못했다. 그래도 가져온 건초는 마저 다 마치고 오늘의 일과를 끝냈다.
갑자기 떡 없는 이 곳에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 저번에 만들고 남은 수제비로 밀떡을 대신하면 되겠다. 다른 재료들은 있고 떡이 문제였는데, 나는 진짜 천재다. 분식집스타일로 먹고싶었는데, 꼭 즉석떡볶이가 된다. 물 조절을 못하는 것 같다. 먹으면서 효리네민박 마지막편을 봤다. 효리네 같은 곳에서 효리네민박을 보니까 조오오오타. 여유롭고 평화롭고 걱정없고.
그때, Hummingbird 벌새가 나타났다. 일주일 전엔가 호스트가 꽃모양의 병을 집 밖에 달아놨다. 처음에는 봄맞이 집단장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안에 뭐가 들어있다. 물어보니 벌새를 위한 설탕물이라고 한다. 병의 끝에 꽃술처럼 빨간 빨대가 꽂혀있다. 이런 자연 속에서 빨간색은 눈에 띄는 색이며 특히 주로 꽃에서 볼 수 있는 색이라 새들이 알아본다고 했다. 또, 벌새는 아메리카대륙에서만 서식하는 철새인데 이 쯤에 이 곳에 온다고 했다. 게다가 학습능력이 있어서 작년에 왔던 이곳에 다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어서 오랜만에 한참을 찍었다. 벌새의 날개가 1초에 60번 움직인다고 하는데, 날개가 멈춰진 사진을 찍고 싶어서 오래 기다리고 여러번 시도 했다. 그리고 결국 찍었다. 신난다.
내 메모리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진들이 아까워 이걸 어떻게든 활용해 보고 싶었는데, 가영언니가 스톡사진으로 등록하는거 어떻냐고 제시했다. ‘아! 맞아 그게 있었지’ 냉큼 이것저것 검색해보는데 이걸로 커피값벌면 감사하겠다라고 생각된다.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나도 그 중 하나고- 많은 결과물들이 생산되는 지금 스톡사진도 이미 포화상태라는거다. 그래도 뭐 못해볼건 없지~만! 오늘은 피곤하고, 내일은 숙소 확인해야하고, 여행준비해야하고 언제 한담. 있는 사진도 아직 정리가 안됐는데.
일기를 쓰며 생각해보니까 맑은 하늘 아래에서 적당히 일하고, 맛있는거 먹고, 사진 찍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얘기하고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영화 한 편 보고자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또 '해야할 일’ 때문에 시간적 압박을 받는다. 완벽한 하루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불행해지는 나는 아마 평생 이렇게 살 것 같다. 사서 걱정하고, 어떻게하면 한 푼 더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한보따리 잘 정리해두고 싶기도 하고, 머릿 속 이미지들을 표현하고 싶고, 그러면서 동시에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야하고. 아직도 욕심이 잔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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