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0일 Golden Lake 2일차
1.
평화롭고 평화롭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백색소음위로 타이핑 소리 혹은 펜이 사각이는 소리가 얹힌다. 넓은 통유리 밖으로는 갈매기로 추정되는 하얀 새들이 즈그들 맘대로 날고 있다. 진짜 맘대로 날고 있다. 자유롭구나. 하얀 데크너머로 하얀 눈 덮인 호수와 회색같지만 하얗다고 치는 구름. 사람이 하얀 방에 갇혀있으면 정신병에 걸린다던데 이곳에선 괜찮다.
하루 8시간을 물 마실 시간도 부족할 만큼 정신없이 일할 때는 하염없이 아픈 어깨를 두드리며,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은 삶을 살고싶었다.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송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곳에 나는 겨우 3주있을 건데 부족함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게다가 지금은 일도 없어서 자발적으로 영상을 만들어보겠다 일을 질러놨다. ‘우리 이제 뭐해? 오늘 일 하나도 안했어’라는 물음에 ‘괜찮아’라고 말한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지? 뼛속까지 자본주의 사고방식을 지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밥 값을 하던 숙박값을 하던 해야하지 않겠나. 98불짜리 마트 영수증을 보았단 말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이 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쓸모란 결국 돈 값.
아침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진아, 너 누구 결혼식 못가지? 축의금 누구한테 부탁했어?’ 캐나다에 와 있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결혼했고, 결혼 할 예정이다. 경조사비가 만만치 않다라는 걸 익히 알고있는 나는 내심 좋은 핑계거리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자괴감이 몰려온다. 이런 나의 처지가 우습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돈만 있는건 아닌데, 너무나도 쉽게 돈으로만 치환된다.
2.
자칫하면 젋은 꼰대가 될 거라는 생각을 오래 전에 했는데 여전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함께 workaway하는 volunteer가 있다. 독일에서 온 이 친구는 나와 다르다. 다름에서 오는 스트레스들이 있는건 분명한데 그냥 그럴수도 있구나 넘어가지 못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리면 나에게도 화가나서 두배로 짜증이난다.
에피소드
* 버릇인지, 그들의 문화인지, 이 친구가 계속 ‘칫’, ‘찻’ 혹은 ‘피식’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비웃을 때 내는 소리인데, 기분이 진짜 별로다. 열심히 사진 찍고 있으면 ‘칫’하고, 내 표정보고 ‘칫’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가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흥미로울 때마다 ‘칫’하고, 밥 먹기 전에 사진찍으면 또 ‘칫’하고(두번은 더 설명해줬는데 여전히 그런다), 재밌거나 웃긴상황이 발생하면 ‘칫’한다. 본인한테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거나, 한국에서는 좋은 의미가 아니니라던가 기분이 나쁘니 자중해달라고 말하면 되는데 말은 안하고 계속 불편해만 하고 있다.
* 마트에서 야채를 담으려고 비닐 봉지를 뜯었는데, 어깨에 손을 올리며 '우리는 환경을 생각해야해’라고 한다. 맞는말인데, '야, 너 바디워시 쓰잖아. 나 안쓰거든. 나도 환경 생각하거든.' 기분이 나빴다.
* 물 때문인지 공기때문인지 이곳에서 손이 계속 마른다. 컨디셔너, 핸드크림 필수다. 이 친구가 자기 핸드크림 다썼다고 좀 써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그래 써라 했다. 뭐 얘랑 쓰다가 다쓰겠다 생각했다. 오늘 오타와에 갔다. 저렴한 핸드크림을 살 기회가 있었는데, ‘못사도 난 괜찮아’한다. 응? 너가 지금 안사면 내꺼 쓸거잖아. 너 왜 자꾸 소모품만 빌려달라고 해.
얘가 나보다 훨씬 어리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건지, 그냥 내 자존심이 상해 기분이 나쁜건지. 둘다겠지 뭐.
그런 의미는 아닐거라는거 알지만 설령 나를 좀 우습게 안다해도 뭐 어때, 그렇다고 내가 우스운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완벽하지 않은게 당연하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 짚어주면 고마운거지. 내가 가지고 있는거 남이랑 나눠 쓰면 어때, 그러고 싶어서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얘기했잖아.
나는 멀었다.
3.
기록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데 아직도 왜 기록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부족하다. 기록과 관련한 책이 많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에버노트를 잘 이용해보려고 하고, 큰 구성은 거의 마친 것 같다. 든든한 빽이 생기니까 블로그나, SNS 이용에 대한 가닥도 슬슬 잡히는 것 같다. 하지만 매우 천천히 구축 될 것이다. 과거를 기록하는 순간은 현재니까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우 게으른 천성을 가지고 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을만큼만 하자.